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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3년 안에 망해보자? 이상한 갤러리 20인의 꿈, 화가협동조합 '갤러리 쿱'

“누구나 그림과 친구되는 세상을” 뜻 같은 전문직 모여 조합 결성

“이젠 예술이 밥 먹여주는 시대” CEO들 만나면 상상력 강조

“여행은 사고의 틀을 깨는 기회” 매년 작가팀 꾸려 해외현장 체험

2015년 문 연 뒤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추석과 설날도 연다. 작년 전시회가 28회, 올해는 25회다. 내년까지 꽉 차 있다. 위치가 묘하다. 화랑이 몰려있는 서울 인사동이나 청담동이 아니다. 서울교대 옆의 평범한 빌딩 그것도 2층에 있다. 여기는 화가협동조합 전용전시공간 ‘갤러리 쿱’이다. 오전 11부터 오후 7시까지 큐레이터 둘과 노신사가 전시장을 지킨다. 노신사는 화가협동조합 황의록 이사장(71)이다.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을 지냈다. 심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얘기를 들었다.

Q 협동조합, 생소하다. A “취미로 사진을 찍으며 화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현실은 작가들이 그림만 그리며 살기 힘들더군요. 미술생태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의미지요. 일반소비자들은 그림 값에 부담을 느껴요. 사치라고 생각하지요. 속아 사지 않나하는 불안감도 있고요. 작가·소비자·화랑 모두 윈윈하는 모델을 생각했어요. 경영의 관점에서 미술을 보게 됐지요. 숲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판을 바꾸려면 누군가 마중물 노릇을 해야겠지요. 협동조합은 그 수단입니다.”

Q 왜 사서 고생을. A “30년 뒤 대한민국을 생각해봤어요.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왔지요. 먹고 살 수 있게 됐지만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어요. 나라 수준에 맞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지요. 병든 사회 치유책은 종교와 예술에 있습니다. 저는 미술에 주목했어요. 사무실이건 가정이건 그림 한 점씩 있다면, 돈이 있건 없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면, 세상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Q 맨땅에 헤딩인데. A “기업을 방문할 때마다, SNS를 통해 제 뜻을 끊임없이 전했지요. 동의하는 분들이 많아지더군요. 사고 한 번 쳐보자고 제안했지요. 그림으로 세상 한 번 바꿔보자, 조합원으로 출자해 달라. 세 가지 단서를 달았어요. ▶없어도 되는 돈이면 받겠다 ▶3년 안에 자본금 바닥나도 하이파이브하며 헤어질 수 있다면 하자 ▶시간 내서 참여해야 한다. 놀랍게도 16명이 1천만~3천만 원씩을 냈어요. 조합원은 교수·기업인·병원장 등 주로 전문직입니다. 몇 억을 내겠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출자자 눈치를 보면 안 되잖아요. 지금 조합원은 20명입니다. 우리끼리는 조합을 ‘바보들의 천국’이라고 하죠. 지갑 열고, 시간 쓰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Q 출자금만으로 운영이 되나. A “조합원 외에 후원회원이 45명입니다. 회원 중에 다른 화랑주도 있어요. 매년 100만원씩 조건 없이 내죠. 작품을 팔면 작가에게 60% 주고 나머지는 운영비로 써요. 재정이 나아지면 작가에게 더 줘야지요. 쿱은 일반협동조합이지만 비영리예요. 모든 거래를 국세청에 신고해요. 고문변호사가 둘, 회계법인 감사도 받고요”

Q 경영과 예술이 만난 건데. A “경쟁력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게 있어요. 보이는 경쟁력의 시한은 6개월이죠. 제품은 모방하고 베끼면 금방 따라가요. 보이지 않는 경쟁력인 상상력과 창조력을 끌어내는 조직이 살아남아요. 그 원천이 예술입니다. 예술이 밥 먹여 주냐고 하지요. 밥 먹여줍니다. 기업을 방문하면 로비에 그림이 있는지부터 봐요. CEO들을 만나면 예술의 쓸모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요. 가정도 마찬가지죠”

황 이사장은 S&P 500지수 산정에 포함되는 기업들을 예로 들었다. 세계 경제의 핵심인 이들의 평균 역사가 16년이다. 이들이 예술에도 투자를 한다는 사실은 이제 새롭지 않다. 미술관 같은 공장도 있다. 페이스북·구글·애플·MS 같은 선도 기업들은 아예 화가들을 직원으로 채용한다. 사내에서 직원들과 어울리며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작품 활동을 하게 한다. 기술과 예술은 경쟁력을 결정하는 양날개다.

Q 견제는 없었나. A “초기에는 상업 화랑들이 왜 작가를 빼 가느냐고 항의도 했어요. 쿱 작가들은 전시를 안 해주겠다고 하고요. 3년이 지나니 그런 일이 없어지데요. 쿱이 경쟁자가 아니란 걸 안 거지요. 우리는 소속작가를 구속하지 않아요. 다른 데서 전시한다면 홍보도 해줍니다. 이제는 다른 화랑서 자문 받으러 오기도 해요”

전시·홍보·판매는 조합 몫이다. 곳곳에 조합이 발행하는 월간소식지 <미술사랑>을 보내고 SNS 등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제공한다. 소속 작가가 되는 길은 까다롭다. ▶블라인드 테스트 ▶작업실 탐방 ▶전시회 3단계 과정을 통해 뽑는다. 전문가 10인이 작가 이름을 가리고 평가한다. 대중성과 잠재력 2가지를 본다. 학력과 전공도 따지지 않는다. 전문가나 평론가만을 위한 작품을 원하지 않는다. 심사위원 70%가 동의해야 통과한다. 그 다음 작업실을 찾아가 환경을 본다. 얼마나 많이 그렸나, 무엇을 그리나, 끝까지 그릴 것인가, 경제 상태는 어떤가. 2단계를 통과하면 초대전을 통해 공개심사를 한다. 매년 자체 심사를 해 작업에 소홀하거나, 발전이 없으면 내보낸다. 독립하는 작가는 아낌없이 돕는다. 해외진출 작가도 나왔다. 치밀한 심사와 관리를 거치니 작품수준이 높다. 소품전을 열어 100여개 작품을 완판한 작가도 있다. 현재 쿱의 작가는 43명이다.

Q 작가들에게 해외 미술현장 체험 기회를 주는데. A “여행은 최상의 공부이고 투자예요.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릴까요. 낯선 데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일을 겪으며 눈뜨고 귀여는 게 여행이죠. 내 안의 나를 찾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현장 공부이지요. 기본기가 돼 있는 작가들에게 체험여행은 사고의 틀을 깨는 기회이지요. 다른 빛과 색과 풍광을 보고 느끼면 작품이 달라져요”

체험 프로그램은 지난해 시작했다. 작년에는 24명이 28일간 지중해와 이탈리아를 돌았다. 올해는 19명이 22일간 모로코와 스페인에 다녀왔다. 큰 일정을 잡고 작은 일정은 작가들에게 맡긴다. 각자 현지 미술관을 집중적으로 돌거나, 작품 대상을 찾아다니거나, 스케치를 한다. 경험은 작가의 무의식에 스미고 작품 위에 나타난다.

Q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A “공짜가 아니에요. 작년에는 조합이 1억을 투자했어요. 다녀온 뒤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팔아 경비를 충당했어요. 그래도 부담이 돼 올해는 방식을 바꿨어요. 개인과 기업 후원을 끌어냈지요. 작가는 후원자에게 그림으로 갚고, 기업은 사내미술관에 작품을 걸지요”

망해도 좋다, 뜻있는 일 한번 해봤다는 기억만 남아도 좋다, 누군가 또 꿈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년, 조합은 건재하다. 내년부터는 전국초등학교에 그림 걸어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할 계획이다. 문화 소외지역인 읍면 단위 1400여개 학교가 우선 대상이다. 황 이사장은 보수를 받지 않는다. 조합원들도 배당을 받지 않는다. 커가는 작은 꿈이 무엇보다 큰 보수라고 생각한다. 황 이사장은 몇 번을 강조했다.

“저는 조합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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